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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소비자 이야기

보이차 소비자 이야기_54_건리정송빙호(2/2)_가짜 보이차 썰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건리정송빙호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한!

가짜 보이차 썰들을 모아본다. 

건리정송빙호 에피소드는 아래 링크로!

https://anotheralpha.tistory.com/146

 

보이차 소비자 이야기_53_건리정송빙호_(1/2)

나도 보이차를 마신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가끔 보이차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불과 지난달의 에피소드이다.     주위 지인이 선물받은 차라면서, 질문을 해오는 경우이다.  건리정송빙호라

anotheralpha.tistory.com

 

 

 

 

1. 유서도 깊은 가차 보이차 사건들. (출처 : 처음읽는 보이차 경제사, 신정현)

 

 

P. 151

2007년에 곤명 부근의 차 공장을 사들여 가짜 차를 무더기로 만든 일당이 적발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가짜 차라 해도 차나무 아닌 다른 식물잎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속인 것은 포장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차에 몇싶년 전에 만든 홍인, 황인과 맹해차창에서 만든 차 포장지를 씌웠다.

공장 한켠에서는 완성차 수십톤과 만들다 만 원료가 쌓여있었다. 

 

(중략)

중국 역사상 차는 돈이 되는 산업이었기 때문에 밀수와 가짜 차가 언제나 문제였다. 

 

(중략)

<호급골동차사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1913년 10월 20일 곤명에 있는 여러 차창들이 한곳에 모였다. 

모두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최근 우리의 도안, 상표를 베낀 차가 대량으로 시장에 유통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신춘호 사장 단예천이 이 일을 하고 있지 뭡니까. 먼저 경찰에 신고하고 신춘호를 덮칩시다."

 

여러명이 신춘호를 덥치니 단예천과 그의 직원 황소재가 한창 차를 만들다가 놀라 자빠졌다.

모차가 십여자루 쌓여있고 솥에서는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긴압을 마친 차는 건조대에서 마르고 있었다. 

 

경찰은 단예천이 그간 작성했던 직업일지를 찾았다. 

어느 날은 장춘호(長春號)차를 만들었고, 어느 날은 서풍호(瑞豊號) 차를 만들었다고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육합춘호(六合春號), 복기(福記), 송인호(宋寅號), 동경호 차 등을 만든 기록도 있었다. 

 

"이 차들은 무슨 원료로 만들었소?"

"저, 그것이 차루에서 먹고 버린 찻잎 찌꺼기하고 운남성 경곡과 귀주성에서 가져온 잎을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찻잎찌꺼기로 차를 만든 것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귀주성 잎을 가져다 차를 만든 것은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귀주성 차를 못팔게 하는 것은 제 상업의 자유를 막는 불공정한 행위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 시대에는 귀주성 잎을 곤명으로 가져다 보이차를 만드는 것이 불법은 아니였다. 하지만 먹고 버린 잎을 모아서 차로 만든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직원 황소재가 단예천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작년에도 가짜 차를 만들었는데, 먹고 버린 보이차와 물에 젖은 차, 곰팡이 난 차를 섞어서 차로 만들었습니다. 

포장지에 사장님이 파 온 상표를 찍어서 외지 상인에게도 팔고, 곤명 상인에게도 팔았습니다."

 

운남성상회는 단예천에게 벌금 5원을 내고 다리를 놓는데 필요한 기부금 100원을 내라고 판결했다. 

단예천은 억울하다고 항소했다고 하는데, 항소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 

 

 

*************

호급차라고 불릴지 몰랐던 1900년대 초반에도 가짜 호급차들이 있었고, 

1960년대에 노주훈이 만들어낸 가짜 호급차들도 있고, 

1990년대에도, 2007년에도, 가짜 호급차들이 있었고, 

지금도 가짜 호급차들이 있다. 

유서가 깊다고 해야할까. 

 

 

 

 

2. 홍인은 어디서 만들었나? 

 

(출처 : 명가원 인스타그램)

 

전쟁이 끝나고, 신중국이 건국되고, 중국다업공사가 세워졌다. (1949년) 역사상 중국 정부는 차를 수출하고 큰 수익을 냈다. 당나라 때부터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까지 차는 중국의 주력 수출상품이고 효자상품이었다. 신중국 정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오랜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해 졌고 새로운 건설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당장 중국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차를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절박함 속에 신중국 건국 후 첫번째로 세운 공사가 중국다업공사였다. 

 

중국 다업공사는 새로운 상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중국의 밝은 미래를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상표를 만들기로 했다. 1951년 신문에 상표디자인을 공모했다. 중국다업공사 직원의 디자인이 당선되었다. 

 

 

가운데 초록색 차 茶 자를 8개의 붉은색 중(中) 자가 감싸고 있는 디자인이었다. 

당선자는 가운데 초록색 차는 좋은 차를, 붉은색 중자는 혁명에 성공한 신중국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1952년 중국다업공사는 앞으로 생산하는 차에 이 상표를 쓰기로 했다. 

이 상표의 이름은 "중"자와 "차"가 들어간 상표라는 의미로 "중차패"라고 불렀다. "패 牌"는 중국말에서 상표를 의미한다. 

 

한편, 중국다업공사의 운남성 지사 격인 운남성 공사도 이 상표를 부착한 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든 중차패 상표는 중국다업공사에서 보낸 것과는 달랐다. 가운데 "차"자까지 붉은색으로 인쇄해 전체가 붉은 색이었다. (그래서 훗날 이 상표는 붉은색으로 인쇄되었다는 의미의 홍인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운남성다엽협회 추가구 회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1년 중국다업공사에서 디자인공모전을 해서 당선된 것이 중차패였다. 1952년부터 중국다업공사는 각 성의 모든 차를 생산하는 단위에 이 중차패를 상표로 사용하라고 했다. 그런데 북경에 있는 중국다업공사 직원이 운남에 내려와서 보니 운남에서는 가운데 차 자를 초록색으로 인쇄하지 않고 붉은색으로 인쇄해서 쓰고 있었다. 

 

이에 직원은 곧바로 본사인 중국다업공사에 이 일을 보고했다. 중국다업공사에서 이 문제를 추궁하자 운남성공사는

 

한번에 초록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인쇄할 기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붉은색으로만 인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중국 다업공사는 인쇄를 두번하라고 했다. 

먼저 가운데 차 자 들어갈 자리를 비워놓고 붉은색으로 인쇄하고, 두번째는 초록색으로 차 자만 인쇄하는 방법이었다."

 

 

 전계서, P. 311

 

"홍인"은 1950년대 신중국에 건설된 후 잠깐 만들어졌다. 제작한 기간이 길지 않기 떄문에 생산량도 많지 않았다. 

시중에 수많은 홍인이 있는데, 그중 1990년대 생산된 홍인은 운남성 공사 사내도급부서에서 주문받아 생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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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인급차 정품이라는 사진들을 보면 실제로, 

차 자만 인쇄물이 아니라, 도장이 찍혀있는 듯한 포장지를 가진 차들도 있다. 

(출처 : 명가원 인스타)

 

 보관 상태가 좋은 홍인 차들은 1편에 3000만원에서 8000만원도 간다고 한다. 

1951년, 1952년에 생산되었음이 위의 에피소드로 반증되는 거니까! 

근데, 역시나, 포장지 갈이에 당할자는 없는 것 같다. ㅎㅎㅎ

 

홍인도 계획경체에서 시장경제체계로 전환이후 (1990년대)  무엇이든 주문대로 다 만들어 주던 시기에 만들어진 홍인이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정보였다. 

포장지 갈이가 아니더라도, 그만큼 오래되지 않은 차를 같은 홍인이라는 이유만으로 1990년대 만든것을 1950년대에 만들어 진것이라고 하거나, 

골동보이차는 포장을 풀어보면 가격이 떨어지니, 풀어서 보여줄 수 없고 시음은 더더욱이 안된다고 하는것이 거래 룰이라고 하니. 어떻게 알겠는가?

 

돈주고 사서 먹어보던가. 그게 아니면.  알수가 없는 세상인것 같다.ㅎㅎ

 

 

 

 

3. 숙차의 아버지, 방품의 큰 손 노주훈. (P. 230) 

 

현재 홍콩은 많은 양의 보이차를 소비하는 한편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차를 공급하는 차중계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홍콩 이전에는 마카오가 차 무역의 중심지였다. 1661년 네덜란드 사람들이 최초로 유럽에 가져간 중국 차도 마카오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 정부가 홍콩을 영국에게 넘기면서 변화가 생겼다. 당시 중국과의 무역을 전담했던 동인도회사는 마카오를 떠나 홍콩으로 갔다. 홍콩은 항구의 수심도 마카오보다 깊어서 배가 드나드는데 유리했다. 

운남 보이차가 홍콩으로 간것은 바로 그 시기, 즉 1850년대부터였다. 

운남에서는 홍콩으로 간 보이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중략) 

 

그의 이름은 노주훈. 몇 년전에 운남에서 발행되는 잡지 <보이>에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1927년에 광동성 조주에서 태어났다. 사방에서 군벌이 난립하고 서양 여러나라들은 중국을 삼키려고 호시탐탐하고 있던 시기였다. 

1937년 일본이 중국에서 전쟁을 일으켰가. 일본 군대는 순식간에 광동까지 밀고 내려홨다. 11살 노주훈은 전쟁과 가난을 피해 마카오로 갔다. 여기저기서 견습생으로 일하다 16살이 되던 1943년에 영기차창에 취직했다. 영기 차창에서 다루었던 차는 홍타, 육안차, 보이차였다. (차중계 무역의 중심이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겨간 후에도 두 지역 상인들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로 친인척이었고 기술자들도 홍콩과 마카오를 오가며 일했다.)

 

(중략)

 

차에 자산감이 붙은 그는 언뜻 엉뚱한 생각을 했다. 

"보이차는 고급이 110~130원이고 싼것은 70~75원 밖에 하지 않는데 기문홍타는 350원이나 한다. 그런데 홍차는 비싸도 잘팔린다. 그렇다면 값싼 보이차로 홍차를 만들면 어떨까? 육안차를 숙성시키듯이 보이차에 물을 뿌리고 며칠 두면 홍차가 될까? 성공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겠구나. 되는 안되는 한번 해보자!"

 

(중략)

며칠간 노력한 끝에 보이차로 만든 홍차를 앞에두고 노주훈은 긴장했다. 마른 상태의 잎 색깔이나 우렸을 때의 탕색, 엽저의 색은 홍차라해도 될 만했다. 그러나 홍타와 완전히 다른 것이 있었다. 맛과 향기였다. 노주훈이 만든 차에서는 홍차의 신선하고 상쾌한 단 맛,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나지 않았다. "차가 이렇게 쿰쿰해서야 홍차라고 팔 수 있겠나" 

그는 두달치 월급을 들고 홍콩으로 가서 향료를 샀다. 향료를 뿌리면 홍차처럼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비싼 돈만 들였을뿐 완성된 차는 홍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홍차는 보이차를 재가공해서는 만들 수 없고 처음부터 홍차로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홍차는 만드는 방법이 꽤 까다로운 차다. 

 

(중략)

그러나 역시 홍차는 아니였다. 노주훈은 홍차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영기차창 일을 했다. 

 

몇 년후 한남자가 영기차장을 찾아왔더, 운남 이무에서 차장을 운영했던 사람인데,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을 버리고 마카오로 온 참이었다. 둘은 운남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 송빙호, 동경호 같은 차들이 여기서 인기가 많았는데,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고 차장들이 다 국유화 되면서 그 사람들이 차를 만들지 못하니 홍콩에서는 부르는게 값인데도 없어서 못판답니다." 

 

노주훈의 눈이 반짝했다. 

노주훈이 만들고 있는 차들은 식당이나 찻집에서 무료로 공급할 정도로 싼 차였다. 그는 생각했다. 

'송빙호, 동경호 같은 차를 만들어 볼까? 지난번 실험을 조금 수정하면 송방호 차맛은 낼 것 같은데...'

 

이번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놀랄만큼 열심히 가짜 송빙호, 동경호 등을 만들었다. 

1960년대 초까지 한달에 평균 2,500~4,200편을 만들었다고 한다. 

10년이면 30~50만 편이다. 

차는 날개돋친듯이 팔렸다. 

 

노주훈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보이차가 시장의 자금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팔려나갔다."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가짜 호급차가 몇십만편이다. 

 

그의 재능과 근면함은 어쩌면 보이차 애호가에게는 재앙일지도 모르겠다. 비싼 돈을 주고 산 노차가 실은 노주훈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4. 보이차 시장에 뛰어든 대만사람들 (P. 304)

 

 

 

대만사람들은 홍콩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활차로 마시던 보이차에 화려하고 현란한 '문화'의 옷을 입혔다. 

오래되어도 마실 수 있는 차, 오래될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차, 

그래서, "마실수 있는 골동품"이라 불리는 차는 대중의 호기심과 동경을 이끌었다. 

 

상인들은 그 환상과 동경을 이용해 오래된 보이차는 투자가치도 있다며 소비자들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렇게 몇십년 된 차는 본래부터 많지 않았다. 

상인들은 이제 차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므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면 안되었다. 

되도록이면 빨리 상품을 시장에 내놓아 수입을 올리고 싶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차를 덥고 습한 곳에 두고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1950년대 홍콩 사람들도 운남에서 온 차를 급히 익히려고 자루째 쌓아놓고 물을 뿌렸다. 물을 뿌리면 뿌릴수록 차는 빨리 익었다. 그러나 물을 너무 많이 뿌리면 차가 썩었다. 차가 썩을 각오를 하고 가끔은 진짜 썩기도 하면서 발효된 차들은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차루에 넘겨졌다. 

 

이후 이 방법을 관동사람들과 운남 사람들이 배워갔다. 

그들도 차를 발효할 때 물을 뿌렸다. 물을 뿌리면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고 미생물은 차를 빨리 발효시켰다. 

40~60일이면 쌩쌩한 생차가 부드럽고 순하고 단 숙차가 되었다. 

 

광동사람들과 운남사람들은 오랫동안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미생물이 지나치게 번식하지 않게 섬세하게 물 양을 조절했다. 그래도 미생물은 통제하기 까다로운 상대였고 까딱 잘못하면 차가 썩었다. 

 

그러나 1990년대 보이차 업계에 돈을 쫓아 뛰어든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몰랐다. 

차를 빨리 익히려고, 그래서 오래된 차처럼 보이게 하려고 물을 뿌렸다. 

물을 어느정도 뿌려야 하는지 몰라서 차가 썩기 일쑤였다. 곰팡이가 잔뜩 핀 차는 퇴창할 틈도 없이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이 노차의 탕색을 보세요. 원래는 노란색 탕색이던 것이 시간이 오래 지나니까 이렇게 짙어졌지 않습니까?"하면

간장처럼 검고 진한 차탕을 소비자에게 주었다. 

 

그런 차맛에 익숙할 리가 없는 소비자들이

"이건 대체 무슨차요, 썩은 관 맛이 나는 군요." 하고 눈살을 찌뿌리면 

태연하게, 

"원래 오래된 보이차는 이런 맛이 나는 겁니다." 라고 했다. 

 

 

"이 차를 마시니까 입이 아프고 목을 긁어내는 것 같아요. 배도 막 아프고 설사도 나는데요?"하면

"아, 그건 명현반응입니다. 너무 좋은 차를 마셔서 몸에 있는 나쁜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이죠"라고 답했다.  

 

그들은 이러한 현란한 장사수완으로 썩은 차를 몇십년 된 오래된 보이차라고 팔았다. 

 

1980년대에 남천공사 사장 주종이 홍콩을 다 뒤져서 100년된 송빙호를 1편 찾았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시절에는 (1990년대) 송빙호, 동경호, 동차호 등의 호급차가 계속 쏟아져나왔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건전성이 배제된 급격한 몸집 불리기에 투기자금까지 몰려들었다. 

 

 

홍콩 사람들이 말하는 '노차"는 그런 것이 아니였다. 

 

홍콩 사람들이 차를 저장하는 방법은, 차에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다. 

대신 바람이 통하지 않는 지하실에 넣어두고 홍콩의 높은 온도와 지하실의 습기만으로 차차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요계도 물을 뿌리면 차가 빨리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을 뿌려서 빨리 익히면 그들이 원하는 진행이 나면서도 본해 생차의 싱싱한 기운도 잃지 않고 투명한 탕색을 가진 차가 만들어 지지 않았다. 

이런 차를 만들려면 지하실의 자연 온도와 습도에 몇년간 노출시켜야 했다. 

그러면 천천히 곰팡이가 피었다. 

 

몇년에 걸쳐 곰팡이가 피면 이번에는 곰팡이를 없애는 작업을 했다. 

건조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차를 두고 곰팡이가 사라지고 맛이 안전되고 진향이 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는데도 몇년이 걸렸다. 

 

그 과정을 거치면 홍콩 사람들이 말하는 '차탕에서 진향이 나는 노차'가 되었다. 

 

 

 

 

 

***********

 

조금씩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대만에서 온 차들은 거르고 싶어진다. 

 

지유명차에 대해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들인 가보다. 

분명, 지유에서 판매하는 차들은, 식품통관이 되어서 한글상표표시가 되어있다. 적어도 중금속이 들어있거나, 농약이 어마하게 들어간 차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차를 마시고 탈이 날 정도로 나쁜 저급의 차는 아닌게 분명하지만, 

그들의 마케팅 방식이 저런 명현현상을 표방하는 약장수 같은 부분이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 같다. 

 

 

지난 가을에 그리도 맛있게 먹었던 부지년산차도 대만에서 온 것이었는데,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고, 100G짜리 한봉지 아껴두고 있었는데. 

올해 가을이 오면 꺼내 먹으려고 한다. 어찌되었든, 독특한 맛이 있는 차이고, 지난 가을과 지금 차마시는 경험이 그새 달라졌으니, 올해 가을쯤에는  차와 관련한 생각들도 바뀌어서. 또 다른 느낌으로 먹을 지도 모르니까!

 

 

https://anotheralpha.tistory.com/53

 

보이차소비자이야기_28_부지년산차 미스테리

어제 부지년산차를 구해와서 오늘 아침 공복차로 마셔보았다. 마실수록 궁금한게 생기는 부지년.어느해의 잎으로 만든 차인지, 어느 지역의 차인지, 생차인지숙차인지 전혀 정보가 없다.근데,

anotheralpha.tistory.com

 

또 모 찻집 사장님이 지유사람들이 노차라고 부르는 차들이 숙차인 경우가 많다는 말도 이제야 정확하게 이해가 된다. 

처음 만들때부터 숙차인 차, 생차보관을 물을 뿌려가면서 익히고 퇴창시켜서 만든 노차(=숙차) 

이렇게 나누어 질 수도 있는 것 같다. 

이해를 강요하는건 대문자 T에게는 택도 없는 것이지.. 암.. ㅋㅋ

 

 

나도 변하고, 차도 변하는 것! 나에게 맞는 것, 내가 끌리는 것을 찾아서!

그냥 KEEP GO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