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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소비자 이야기

책책책_8_와비사비, 침묵의 다도 무언의 전위

 

 

왼쪽에 있는 책은 다음번 독서모임의 주제책이라 시작을 했는데. 

당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내가 너무 자본주의 경제논리에만 찌들어 살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일본의 유명한 센노리큐라는 다인과 그가 주창한 와비사비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누군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본의 한 전위예술가가 히데요시와 센노리큐를 다루는 영화의 각본 작업을 하고난 이후에 쓴 에세이 같은 책이다. 

그 전위예술이 무엇인지,  느낌적인 느낌도 없거니와, 책을 쓴 전위예술가가 누군인지, 그의 아트피스가 뭔지도 전혀 모르기에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해서.. ㅋ 책을 읽던 중간에 와비사비 책을 구입해서 읽었는데. 

이것 역시 잘 모르겠다.. ㅎㅎ

 

좀 직관적인 전달을 위해. 와비사비를 구글에 검색하면, 이랗게 나온다. 

 

검색하면 이렇게 나옴에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와비사비,라는 것이 말이나 정형화된 어떤 형태가 아닌 어떤 추상적인 미적 감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저렇게 표현되는 것 자체가 와비사가 아니라고 두개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럼 어떻게?.. (마치 경전이 없는 무언의 밀교가 경전이 없어 그저 절멸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일단,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하거나, 기억에 남는 것을 위주로 정리하련다. 

 

 

- 차와 관련된 썰들로 연결되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두(차선생님?) 였던 센노리큐가 만들어낸 것이고, 

일본의 미학중, 섬세하고 우아한, 화려함의 미학과 대척점에 있는 어떤 다른 미적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히데요시가 화려하게 금으로 발라진 차실을 좋아했음에도, 리큐는 조선의 초가집과 같은 3평 내외의 다실을 추구했고

다기도 화려한 청나라의 다기가 아니라, 한국의 막사발(이도다완)이라 불리는 것을 청나라의 다기들보다 가치가 높은 것으로 자리매김시켰다는 것.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13 와비사비의 아름다움이 모든 이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다. 

 

P. 37 (모더니즘과 유사하지만, 다른 면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

모더니즘은 "애매함과 모순에 비관용적"인데 반해 와비사비는 "애매함과 모순을 편안하게 수용"한다는 것. 

(이외에도 많은 차이점을 열거하고 있기는 하다. 책에서는)

 

P. 43. 리큐 사망 뒤 약 100년이 지나 차의 '예술'은 차의 도 道, 즉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수렴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런 전환기에 차의 '정신적'핵심인 와비사비는 규칙과 어록의 결정판으로 단순하게 축소되고 포장되었다. 와비사비는 그 본질과는 정반대로 매끈하고 세련되며 멋진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역사를 계승해서 제도화된 다도 유파들은 전통적 형식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도유파들이 없었다면 현재 남아있는 와비사비 조차도 일본의 광적인 서구식 현대화에 더 빨리 쇠퇴했을 것이다. 게다가 형식화괸 다도 연습에는 명상수련으로서 가치가 여전히 남아있다. 생각하지 않고 형식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예술적이든 아니든 판단할 필요없이 그저 지금, 바로 이 장소에 집중하게 된다.

 

P. 73. 본질에 집중하고 물질적 상하관계를 무심히 대한다. 

 

다실에서 일어나는 규정돠고 짜여진 행동은 와비사비의 가치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다회에 참석하는 모든 이는 겸손을 상징적으로 표하기 위해 일부러 작게 만든 다실 입구로 허리를 굽혀 기어들어가야 한다. 다실 안에서는 모든 것을 동등하게 대하는 분위기가 흐른다. 

 

이 물건은 비싸니까 품질이 좋고 저 물건은 저렴하니까 품질이 나쁘다는 식의 위계적 사고방식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실밖에는 전혀 다른 사회계층에 속한 가난한 학생, 부유한 사업가, 영향력있는 종교인도 다실안에서 만큼은 모두 평등해진다.

 

다구류도 마찬가지이다. 안목있는 참석자가 보기에 그 본질이 명백하게 드러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다구의 유래와 장인의 이름처럼 식별에 도움이 되는 관습적 지식은 와비사비에서 중요하지 않다. 가격과 관련된 물질적 가치의 일반적 상하관계도 배제된다. 진흙, 종이, 대나무는 사실상 금은보석보가 와비사비의 본질적 특성과 가치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와비사비에서 '가치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가치가 있다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건은 그 물건의 진가가 인정되는 오직 그 순간에만 와비사비의 경지를 구현한다.  

 

(*이런 말들이 전혀 이해가 되지않고, 느껴지지도 않아서,, 나는 이만 로그아웃...

한편으론 센노리큐라는 사람이 스스로가 가진 신분이나 재력,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부족함과 반감으로 되려 이런 개념들을 만들어 낸건 아닐까 하는 불경스럽고 베베꼬인 생각이 들정도이다..  )

 

 

 

P. 85 꾸밈없다. 

와비사비한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양상을 나타낸다. 

나는 중요하다고 외치거나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겸손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존재감과 차분한 권위가 있다. 

와비사비한 것은 자연스럽게 주변과 공존한다. 

 

 

 

P. 85 소박하다. 

와비사비한 것은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보통 흙속에 혹은 흙위에 있는 본래의 상태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공되지 않은 거친 질감과 촉감이 풍부하다. 

거기에서 수공예적 기교를 찾아보기란 불가능 할 것이다. 

 

 

 

P. 88 단순하다. 

와비사비한 것의 핵심은 단순한 것에 있다.

물론 무無는 궁극의 단순함이다. 

그러나 무 이전과 무 이후의 단순함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리큐의 말을 빌리자면 와비사비의 본질은 다도에서 행하는 것처럼 단순함 그 자체이다. 

물을 떠오고 장작을 모으고 물을 끓이고 차를 준비해 손님에게 대접한다. 

그 이와의 세세한 부분은 참석자의 창의성에 맡겨두기를 권한다. 

 

하지만 검소함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단순함에 필요한 신중함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으면서 모든 필수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단순함을 실현할 수 있는가? 

 

******

 

결국 내게 와닿는 문장은 바로 위의 이 볼드처리한 문장뿐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말이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중용의 미학같다고 느껴지지만, 내가 이해하는 와비사비는 그렇게 명확한 개념이 아니야라고 말할 것만 같아서.

도저히 알수가 없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나는 예술가가 되기는 글렀다. 

숙련된 기술을 가진 공여가도 되기는 글렀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검이불루 화이불치만 두어도 썩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

책에 쓰여진 글들은 도저히 더 다가오지 않아서. 

눈길에 닿은 몇장의 사진들만 옮긴다. 

 

 

 

 

 

 

 

 

이만끝!